윌리엄 호가스, <그레이엄 집안의 아이들>, 1742년, 캔버스에 유채, 영국 내셔널 갤러리.
13살에 데뷔한 가수 보아가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소개했던 일화다. 데뷔 당시 인터뷰에서 리포터가 “티브이(TV)에 나오면 13살다운 생활은 잘 못 할 것 같다”고 질문하자 13살 보아는 “아쉽다”면서도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다. 한마리 토끼라도 잡으려고 한다”고 답했다. 이 이상 야무진 대답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그게 바로 문제였다. ‘뭔 애가 말을 저렇게 하냐’, ‘애늙은이 같다’는 악성 댓글이 무수하게 달린 것이다. 33살의 보아는 과거의 영상을 보며 “욕을 많이 먹었다. 저 이후로 내 입으로 ‘두마리 토끼’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 상처받았을 어린 시절의 내게 약간 미안하다”고 토로했다. 악플 테러 이후 그녀는 ‘보아답게’가 아닌 ‘어린이답게’ 행동해야 했다는 얘기다. ‘어린이답게’란 무엇일까? 어른이 정한 테두리에 있으라는 말이다.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어수룩할 정도의 순진함을 기대하는데, 그 기대의 테두리를 넘어서면 당장 ‘어린이스럽지 않다’는 판결이 내려진다. 대체로 어른은 어린이를 독립 개체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 눈에 비친 어린이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하기에는 미숙한 존재이고, 어른의 소유물이며, 과도기의 인간일 뿐이다. 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도 책 <어린이, 세번째 사람>에서 다음과 같이 짚었다. “어린이는 아직 성장을 완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율성과 독자적 정체성을 부정당하면서 ‘나중에’ 말하라거나 ‘가만히 있으라’는 요구를 받는다. 크면 다 해주겠다는 말, 다 할 수 있다는 말은 어린이의 힘을 유예시키고 창조적 도전을 저지하려는 순간에 만능 칼처럼 사용된다.” 이런 상황이니 ‘어린이답게’라는 말은 ‘부족한 인간’답게 행동하라는 말과 다름없지 않을까.
상류층 ‘그레이엄 집안의 아이들’
몸 압박하는 어른 옷 그대로 입혀
‘얌전히 있으라’고 한 관습 보여줘
새삼 놀라운 것은 ‘부족한 인간’이라며 어린이들을 얕보았던 어른들이, 정작 어린이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할 때는 어른이나 다름없게 대했다는 점이다. ‘성장 중의 인간’인 어린이는 모든 것이 어른 중심으로 맞춰진 사회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신이 편리한 대로 어린이들을 대해왔다. 가슴엔 순수한 동심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행동은 어른처럼 하기를 어린이에게 요구한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아는 ‘아동기’라는 개념도 탄생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필리프 아리에스의 책 <아동의 탄생>에 따르면 사회적 제도로서의 아동기는 18세기에야 비로소 발전했다. 즉 핵가족과 근대 학교 교육이 확립되기 전, 아동기는 생애주기에서 성인 기간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당시 아이들의 복장은 그것을 명확히 입증해준다. 이 시절 아이들은 같은 신분의 성인 남성과 성인 여성처럼 옷을 입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1697~1764)의 1742년 작 <그레이엄 집안의 아이들>에서 ‘아동복’ 개념이 없던 시절의 어린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속 아이들은 영국 왕 조지 2세의 전담 약사였던 대니얼 그레이엄의 네 자녀다. 가운데 두 딸은 당시 만 9살의 헨리에타 캐서린과 만 5살의 애나 마리아. 하지만 두 아이는 마치 성인 여성처럼 고래 뼈로 만든 딱딱한 코르셋을 입고 부풀린 치마 아래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다. 소년도 마찬가지다. 오른쪽에 버드 오르간(bird organ)을 가지고 놀고 있는 만 7살의 리처드 로버트는 조끼를 받친 꽉 끼는 슈트를 입고 스타킹을 신고 있다. 심지어 왼쪽에 황금빛 새 장식이 있는 유모차를 타고 있는 아기마저도 뻣뻣한 옷을 입고 있다. 아이들은 과연 이 차림으로 편하게 몸을 움직이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을까? 아니, 옷은 아이의 행동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규율관 역할을 했다. 아이들에게 옷은 ‘얌전히 있으라’고 경고하는 어른의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에 따라 어른 옷을 입은 채 성장한 어린이들은 여러 부작용을 겪어야 했다. 옷이 몸을 압박해서 음식 소화에 어려움을 겪었고, 여아의 경우 코르셋 마찰로 피부에 상처를 입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 갈비뼈와 척추가 변형되었다. 이런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어른 옷을 아이에게 입히는 관습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왜냐하면 이 불편한 옷은 육체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 사회적 신분과 계급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레이엄 집안의 아이들>은 당대 영국 상류층이 아이들을 부와 성공을 과시하는 증표로 삼은 흔적인 셈이다.
‘버찌를 든 소년’ 가난한 주인공
설탕 도둑질 탄로나 세상 등졌지만
어머니는 아들 목맨 밧줄 팔 생각만
그렇다면 빈곤계층 아이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작은 어른’으로 여겨졌다. 어른처럼 한명의 인간으로 존중받았다는 게 아니라, 어른처럼 노동해야 했다는 의미다. 가난한 집 아이의 삶은 성인 노동자로 성장하기 위한 ‘도제살이’나 다름없었고, 아이도 스스로를 도제 단계를 거치게 될 미래의 어른으로 보았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노동 착취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1918년 소비에트 가족헌장은 이러한 폐해를 막기 위해 아예 입양금지 조항을 만들기도 했다. 러시아 농민들이 아이를 입양 형식으로 데려와서 노동력으로 가혹하게 부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산업혁명 시대 공장의 노동자로 취직한 아이들의 상황은 더 비참했다. 자본가들은 값싼 임금으로 부릴 수 있는 아동의 고용을 더욱 선호했고, 그 착취의 현장에서 학대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당시 아이들은 심한 경우 하루 최대 19시간을 일해야 했지만, 식사 시간을 포함해 단 1시간만 쉴 수 있었다. 지각을 하면 일당이 4분의 1로 줄었으며, 매질도 견뎌내야 했다.
에두아르 마네, <버찌를 든 소년>, 1858년께, 캔버스에 유채, 포르투갈 굴벤키안 미술관.
프랑스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그림 <버찌를 든 소년>에 등장하는 알렉상드르도 밥벌이에 나선 아이였다. 그림 속 알렉상드르는 체리 한 다발을 받아들고 돌담에 기대어 해맑게 미소 짓고 있지만, 실제 알렉상드르의 생활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알렉상드르는 자신의 입을 덜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아이였다. 마침 마네의 화실이 집 근처에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알렉상드르는 마네의 일을 도우며 돈을 벌게 되었다. <버찌를 든 소년>의 모델이 되기도 하고 붓을 씻거나 심부름을 하던 알렉상드르는,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부르주아였던 마네의 화실에 넘쳐나던 설탕과 음료수를 맛보고 싶은 유혹에 이기지 못하고 이를 몰래 훔친 것이다. 도둑질은 금세 탄로 났고, 마네에게 모질게 야단을 맞은 알렉상드르는 그만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마네의 화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죄의식에 시달리며 주검을 끌어내려야 했던 마네는 경찰의 심문을 받은 후 알렉상드르의 가족에게 그 소식을 전했는데, 가족들의 반응이 예상과 너무도 달랐다. 알렉상드르의 어머니는 슬퍼하기보다는, 아이가 목을 매는 데 사용한 밧줄을 손안에 넣는 데 혈안이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는 ‘돈이 되는’ 이 밧줄을 여러개로 자른 다음, 이웃 사람들에게 비싸게 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목을 매단 밧줄은 행운을 가져온다’는 미신이 당시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상드르의 어머니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알렉상드르를 특별히 미워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 당시 빈곤계층 아이들은 가정에서 그 정도의 위치였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상당수 어린이가 성인이 되기 전 목숨을 잃었고, 부모는 이를 가슴 아파했지만 곧 다른 자식을 갖게 되면서 쉽게 잊곤 했다. ‘일종의 익명 상태’, 이것이 바로 당시 어린이가 맞닥뜨리는 현실이었다. 피터 스턴스의 책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는 어른들이 주도하는 사회 속에서 어린이들의 지위가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 촘촘히 기록돼 있다. 생산력이 떨어지는 사회에서 어린이들은 식량부족을 이유로 살해되거나 죽도록 방치됐고, 원거리 교역이나 대륙 간 교류가 확대되면서 노예로 팔려 나갔으며, 현대에 들어서는 소년병으로 분쟁지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성인(成人)이란 낱말부터가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니 역으로 생각하면 성인이 되기 전 어린이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오죽했을까.
물론 요즘 어린이는 옛날 어린이의 처지와 같지 않다. 누군가 ‘어린이를 사람답게 대접하라’고 말한다면, 많은 이들이 코웃음 칠 것이다. 요새 아이들은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버르장머리가 없을 정도인데, 무슨 어이없는 말을 하느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당장 호가스, 마네의 그림 속 아이들과 요즘 아이들의 상황을 비교해봐도 그렇다. 현대의 아이들은 신체 발달에 맞춘 ‘아동복’을 입고 자라며, 만약 어른이 아이에게 힘든 노동을 시키면 바로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왕처럼 키운다’는 우리 사회에는 희한하게도 어린이를 비하하는 표현이 넘쳐난다. ‘잼민이’, ‘급식충’이라는 단어는 어린이를 업신여기는 전형적 표현이고, 초보자 혹은 입문자를 일컫는 ‘주린이’, ‘캠린이’ 등 ‘○린이’라는 표현은 어린이란 본래 어설프며 서투른, 덜된 존재라는 속뜻을 담고 있다. 심지어는 어린이의 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노키즈존’도 곳곳에 존재한다. 수심 깊은 수영장처럼 안전을 위해서 아이의 출입을 막는 게 아니라, 단지 어른들의 ‘기분권’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어린이의 출입을 통제한다. ‘노키즈존’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이미 ‘키즈(어린이)의 존재 자체가 민폐’라는 폭력적 시선이 읽힌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어린이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13살 보아는 비난받았는데, 또 ‘어린이스럽다’는 이유로 어린이는 문전박대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요즘 어른들은 옛날과 달라서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있지’라고 하면 과연 그 말이 신빙성 있을까? 어쩌면 어른처럼 ‘되바라지지’ 않으면서도 어른처럼 ‘착하게 단정히 있는’ 아이들만 존중하겠다는 뜻은 아닐까. 작가 박선영은 책 <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에서 아이를 기르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책임(감)을 뜻하는 영어 단어 ‘리스폰시빌리티’(Responsibility)가 응답(response)과 능력(ability)의 결합으로 이뤄진 합성어라는 사실은 절묘하다. 육아서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반응하는’(responsive)인 이유이기도 하다.” 박선영의 말처럼, 어른들은 아이에게 반응해야 한다. 단, 어른 중심의 잣대를 버리고, 아이의 관점에서 말이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어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우주이지만, 아직 어른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잘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어른의 ‘책임’이라면, 이제 어른들이 먼저 ‘응답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관용과 기다림을 자양분 삼아 괜찮은 어른으로 차츰차츰 자라날, 그런 ‘작은 인간’들의 목소리에.
▶ 이유리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썼고,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한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을 묶어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이번엔 그림을 매개로 인간 사회에 작동하는 다양한 층위의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3주에 한번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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